농민운동가 김용기 장로 [제1200호] 2009년 10월 3일]
김용기 장로는 1909년 9월 5일 경기도 남양주 와부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김춘교와 어머니 김공윤 사이에서 다섯 형제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런데 김용기가 세 살 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그의 어머니는 크게 근심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을 데려다가 밤을 새면서 굿을 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또 점쟁이에게 물어보면 좋은 약 처방을 받을까 하여 그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점쟁이 앞에 정성을 다해 아이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 점쟁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이 아이는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린 용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용기 어머니는 이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려고 하는 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머니는 전도지를 주면서 이 길로 10리 정도 나가면 용진교회가 있으니 계속 걸어가라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어머니는 열심히 걸었다. 그런데 아이가 크게 숨을 쉬더니 엄마를 부르면서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기에 가까운 주막집에서 잠깐 쉬면서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을 얻어 주고 그 아주머니가 준 전도쪽지를 읽어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용기 엄마는 두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해’라며, 그 발걸음을 재촉하여 용진교회를 찾았고 이후 계속 출석하게 됐다. 그렇게 용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동중학교에 진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중국 심양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국의 넓은 대륙을 보고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농사 짖는 법을 배워야겠다 결심하고 곧 귀국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농사짓는 동안 성년이 되었고 이웃 마을에 사는 김봉화 양과 결혼도 하였다. 농군의 아들, 딸이었던 이들 부부는 흙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복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농토를 일구어 농사를 짓던 김용기는 버려진 땅을 찾던 중 4000여평의 땅을 싼 값에 구입을 하여 ‘봉안 이상촌’을 계획하고 기도하던 중 좋은 동지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양평에서 여운형, 홍천에서 이인준, 광릉에서 최광렬 등이 ‘봉안 이상촌’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이 모두 봉안 마을로 이사를 오자 농촌이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김용기를 중심으로 해서 마을 한복판에 봉안교회를 설립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조선 농촌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교회를 중심으로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봉안 마을은 겨울이 되어도 투정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 남자들은 겨우내 가마니를 짜서 시골 장터에서 팔아 가정생활에 보탬을 주었다.
김용기는 해방이 되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복민사상운동(福民思想運動)을 전개하면서 1946년 10월 일본인이 운영하던 삼각산 아래에 있는 과수원을 인수하여 온 가족이 개간하여 많은 수확을 올렸다. 김용기 가족이 황무지 땅 1만평을 개간하여 만든 과수원은 당시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재, 서울 은평구 구기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이곳에 교회를 신설하고 활발하게 ‘농촌 이상 운동’을 전개하다가 과수원과 교회를 유재현 목사에게 인계하였다. 현재 이 자리가 임마누엘 수도원이 되었다.
김용기는 1950년 6·25전쟁으로 황폐화 되었던 용인군 원삼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건설하고 복음 농도원과 복음농민고등학원을 창설하였다. 김용기 장로는 이곳에도 역시 교회를 신설하고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 학원이 근간이 되어 그가 평생을 바랐던 이상촌 건설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광주군 황산 그 넓은 황토밭을 개간하여 1955년 가나안농장이라 이름 짓고 드디어 1962년, 평생 원하는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하고 농촌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평생 농촌에 살면서 농촌지도자가 되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학교만 설립한 것이 아니라 농촌운동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가난안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비로소 가나안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고 믿음의 반석 위에서 훈령생과 함께 교회를 통하여 영성훈련을 함께 시키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이때 가나안교회는 영성훈련장이 되기도 하였다. 광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가 서울시로 확대되자 가나안농군학교 제2캠퍼스를 마련하게 되었다. 공기 좋고 자연환경이 좋은 강원도 원성군 신림에 제2가나안농군학교 설립하였다. 역시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거기에서 근무하는 김용기 장로의 자녀들은 학감, 교무과장 여기에 교관까지 모두 맡아 수고를 하였다.
일생을 오직 이상촌 농촌을 만들겠다는 그의 위대한 정신이 1966년 필리핀에서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해서 상을 주는 막사이상을 한국의 농촌운동가 김용기 장로가 사회공익상으로 수상을 하였다. 그 이후 농림부 장관상, 향토문화공로상, 고려대 창설자인 인촌 문화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을 하였다. 1978년에는 필리핀 세이버대학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김용기 장로는 평생을 양복, 구두를 신어 본 일이 없으며, 평생을 자신이 재단한 간단한 국민복, 고무신을 신고 1988년 8월 1일 농사꾼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