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8월 월간중앙 특별기획 "건국 30년을 움직인 100인" 교육·사회부분에 백낙준, 최규남, 김활란, 조동식 선생과 함께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소개됨
1980년 8월 24일 주간 한국(제823호)
"조국이여 안심하라"
『한 손에는 성서를 쥐고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머리에는 애국의 면류관을 쓰고, 허리에는 겸손 의 띠를 두르고, 발에는 개척의 신을 신고....』
이것은 안병욱 교수가 김용기 장로를 지칭한 말이다. 「가나안농군학교」로 널리 알려진 그 김용기씨가 지난 주 우리 국민에게 보내는 제언저 역서 「조국이여 안심하라」를 펴냈다. 난국속의 조국을 구하고자 그 길을 밝힌 김용기 선생의 지침서를 부분 발췌·수록.
1981년 10월 25일 선데이 서울(제672호)
"삶의 향기 찾는 원로와의 대화 - 일가 김용기 박사"
게으른 사람일수록 불만 많아 놀고 먹으면 정신조차 흐려져…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1983년 9월호 여성동아
"탐방 -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우리 땅 잘 가꾸면 1억은 살 수 있어: 한국농촌운동의 선발대이자 통로이기도 한 강원도 신림의 제2가나안농군학교에는 폭양속에 땀과 열매가 함께 익어가고 있고 농촌의 기둥이 될 젊은이들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1984년 4월 여고시대
학생문화의 부흥을 위한 본지독점 강제인터뷰 시리즈-④ "내 인생 70은 흙이었다"
올해 나이 73세. 평생을 흙과 함께 살고 또한 앞으로도 흙과 함께 살아가길 바라는 참된 농군이요 교육자인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농촌의 부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고 칠순이 지난 지금도 신림에서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알려주어야 할 일이 많아 후세 교육에 힘쓰고 계신 김용기 박사님을 만나 뵈었다.
1984년 2월 26일 The Korean Herald (p.1-4)
Dr. Kim leads 4th service 'Nong-gun'
Ganaan gives farming new image.
1987년 3월 28일 조선일보
[朝鮮인터뷰] - "농사는 政治수단으로 풀어선 안돼"
농촌문제는 政治로 풀어서는 안되며, 정부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
1987년 7월 26일 일요뉴스 (p.1-2) [인물클로스업/농촌운동가]
"지금은 농민의 소리에 귀기울일 때"
대전환기의 길목에 들어선 오늘 농민들의 주름살을 누가 펴줄 것인가. 그늘진 곳에서 외롭게 30만평의
농군'을 키워온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 김용기 선생의 외길인생과 그의 목소리.
1987년 11월호 월간 조선 통권 8권 11호 (p.291-315)
"가나안'의 農軍 金容基 장로"
대통령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접전이 붙은 당시, 정치에 초연한 농군이 정치인들에게 던지는 경고장, 그리고 마적단에 들어가 중국을 지배하려던 꿈많은 소년이 15만평의 가나안 공화국을 건설하기까지의 피땀어린 개척사.
1987년 12월호 강원일보 제11529호
[金容基박사 新春 특별인터뷰] - "農業발전없이 선진국 될 수 없다"
게으르지 않고 연구하면 농사는 최고의 직업인데 이농하는 현실이 딱하다는 김용기 박사. 바른 윤리관, 바른 노사관, 바른 정치, 바른 사회, 바른 국가에 대하여 소박하고 담대하게 얘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