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6일 한국일보
평생농군' 마지막 길, 農民들 哀悼"
'평생농군'의 장례는 농민을 하나로 모은 경건한 의식이었다. 유족들도 喪服대신 農民服을 입었다.'
1988년 8월 6일 조선일보
"金容基 장로 어제 農民葬"
一家 金容基 장로의 장례식이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정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장으로 엄수됐다.
1988년 8월 6일 동아일보
"福民정책 큰 뜻 이루겠습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원장 강원용씨가 "故 金容基 형님 영전에..."
1988년 8월 14일 주간 한국 통권 제1232호 (p.18-21)
[커버스토리] - "농민의 아버지 金容基 장로 가나안으로 돌아가다"
가나안農軍학교 이사장 金容基 장로가 8월 1일 별세했다. 한국의 농촌을 덴마크의 선진 농업사회처럼
만들고 싶었던 金장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식사를 하지 말라고 준엄히 꾸짖었던 농사꾼인 그가 사랑하고 아끼던 시골의 흙속에 묻힌 것이다.
1988년 9월호 ? (p.414-420)
"아버지는 영원한 농사꾼으로 계십니다"
일생동안 투철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다같이 복되게 사는 길을 몸소 실천하여 농촌 계몽 운동을 벌여온 진짜 농사꾼 金容基.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장으로 이승을 떠난 그는 수백만 농민의 가슴에 긍지와 애국심을 심어준 농촌운동가, 새마을 창시자. 맏딸 김활란씨의 회고를 통해 위대한 농사꾼의 일생을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