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효는 ‘세대간의 하모니'이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김시우 박사
꿈의 사람 요셉. 그 요셉을 닮고자 평생 삼결(三潔-술, 담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깨끗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온 김시우 박사. 3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할 무렵 성산효대학원대학교 박사 1기로 입학해, 지금은 효학박사 1호로 ‘새로운 효’를 전파하며 인생 2막을 열정적으로 보내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 의식이 깊은 유교의 효 개념에서 벗어나 성경적 효를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는 한편, 학교와 교회 및 기관에서 ‘효’를 전파하고 다닌다. 그가 말하는 효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로서 ‘세대간의 조화(HYO ; Harmony of Young and Old’를 강조하는 ‘신효(新孝)’다. 현대사회의 대안윤리로 내세워도 손색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요셉을 삶의 멘토로 삼고 한결같은 길을 걸어온 그의 삶을 들여다보자.


요셉을 삶의 멘토로 삼다
경상북도 경산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김시우(時佑) 박사. 어머니는 교회에 다녔지만 아버지는 불신자였다.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 부흥회에 자주 쫓아다녔다. 박용묵 목사가 부흥 집회에서 ‘효’에 대해 강조하면서 책자까지 나눠주는 것을 보고 평생 효를 실천하리라 다짐을 했다. 크리스천으로서 ‘대효(大孝)’는 불신자 부모를 전도하는 일이라는 말이 마음 깊이 박혔다.
주일학교에서 반사 선생님들이 예화로 자주 들려주신 요셉을 효를 실천한 모델로 삼았다. 열일곱 나이에 다른 나라로 팔려갔지만,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득죄하리이까?” 하는 마음으로 온갖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쳐 서른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 7년 기근이 닥쳤을 때 고향의 부모형제들을 구제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던 요셉이 평생 닮고 싶은 모델로 어린 가슴에 확고히 자리잡았던 것이다. 요셉처럼 깨끗한 삶을 살고 유능한 인물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고 그들을 하나님나라로 인도하겠다는 결의이기도 했다.
우선 불신자 아버지를 전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거지 나사로의 예화에서처럼 자신은 천국에 가 있는데 아버지가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아버지가 예수 안 믿고 지옥가면 다른 것을 잘 해서 효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마음이었다.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서 집안일도 열심히 거들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동네 사람들이 “OO집 아들 좀 본받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문중 일을 할 때 중심 역할을 하고 계셨기에 쉽게 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문중에 대한 책임이 컸던 것이다.
일흔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시한부 한 달을 선고받고 아들이 적어준 주기도문을 열심히 외운 후 회복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회생 후 5년을 더 살면서 아들의 소원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아버지가 집사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는 ‘대효’를 이루었다.

삼결(三潔)을 실천하다
집안형편을 고려해 중학교는 고향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대구 경북고로 진학했다. 요셉이 온갖 고난을 겪었듯이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에서 절제했다. 이 무렵 결심을 했다. 평생 술과 담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삼결(三潔)’ 다짐이었다. 대학생활과 군 복무 기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다짐을 실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에서는 그나마 친구들이 이해를 해주었지만 군대에서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은행원, 지점장으로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일 때가 부지기수다. 술자리에 함께하게 될 때는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요셉이 끝내 정결을 지켰듯이 신앙으로 이겨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겠다는 다부진(?) 목표를 세웠다. 요셉을 능가하겠다는 욕심이었다. 검정고시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이 일을 계기로 굳이 서울로 가지 않고서도 요셉처럼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남대 법학과(67학번)에 진학하여 C.C.C.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늘의 대학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메시지가 많이 와 닿았던 거죠. 판·검사 되고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대학생들을 전도하는 것이 더 값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도에 힘쓰다보니 신앙도 더욱 성장했다. 대학생활은 C.C.C. 활동하랴, 교직 과목 이수하랴, 교회 중고등부 교사 하랴 시간이 빠듯했다. 70년을 살아도 200년을 산 것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아버지를 전도하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R.O.T.C 훈련을 받고 포병장교로 군 복무를 할 때도 전도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군목이 없을 때는 설교를 도맡아했다. 중위 시절에는 강원도 인제에 기린장로교회를 개척했다. 중위는 영외(營外)에서 하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효학박사 1호가 되다
요셉처럼 살겠다는 굳은 의지는 직장 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은행에서 직책이 올라가면서 술자리를 피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고객이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기도를 했다.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시카고은행 서울지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고등학교 시절 한영 성경을 보면서 닦은 영어 실력은 이미 통역 장교 시험에 월등한 성적으로 합격함으로써 입증된 바 있지만 직장으로 이어졌다. 외국계 은행이라 술자리에 가더라도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술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더 이상 난처해질 일이 없었다. 퇴근도 정시에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해주셨는데 뭘 해야 할까 고심했어요. 서울대 국민윤리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죠. 당시에도 효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효를 국민윤리의 중심으로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외국계 은행에서 지점장까지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한미은행(지금의 한국시티은행)을 설립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한미은행 창립멤버로 들어가 신우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지점장을 하면서도 삼결에 대한 의지는 그대로 실행했다. 지행(知行)불일치, 학행(學行)불일치, 신행(信行)불일치의 시대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겠다는 확고한 신행일치의 삶이었던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을 즈음 성산효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평소에 제2 외국어로 중국어를 공부해 놓았던 덕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학번 1번으로 입학해 2006년도에 효학박사 1호가 되었다. 한국의 효학박사 1호는 세계의 효학박사 1호인 셈이다. 어릴 때의 꿈을 하나님께서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인도해주셨던 것이다.

‘효’ 전도자로 2막 인생을 살다
효학박사 학위 수여는 인생 2막을 새롭게 열어주었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효를 강의하고, 중·고등학교와 교회, 각 기관이나 단체에 나가 효를 전파하는 지금의 삶이 직장 다닐 때보다 더 보람되다. 대학시절 워낙 C.C.C. 활동을 열심히 했기에 주변에서는 신학 공부를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이미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목회자로 섬기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보다는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가 많아야 사회가 밝아지고 교회가 좋아진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모두 장군이 되겠다면 전방은 누가 지키겠어요. 평신도들이 사회에서, 직장에서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해요. 내가 술과 담배, 여자를 멀리한 것은 그것들이 부정부패로 연결되기 때문이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술은 먹지 않지만 일은 맡기면 잘 한다.’는 평을 듣도록 해야 해요. 크리스천이라며 술과 담배는 안 하면서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오히려 욕이 될 수 있거든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성실한 마음으로, 단[甘] 마음으로 하라는 에베소서 6장 5~9절 말씀은 그의 삶을 지탱해온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도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주장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학 1학년 때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돌아와 ‘효’를 강조하던 김용기 장로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왜 효인가
‘성경적 효’는 부모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섬기는 것이다. 조상을 섬기듯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십계명 중 대신(對神)관계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어요. 신앙은 행위로 나타나야 하고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어야 옳은 신앙이라고 봐요.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한국 교회가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도생활은 많이 하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질타를 받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시작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부모공경에서 인간관계의 기초가 닦아진다고 보기 때문에 효는 이 시대에도 꼭 필요한 덕목인 겁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관계가 잘못되면 사회 문제가 발생하며, 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덕목이 ‘효’라는 것이다. 가르칠 교(敎)를 분석해 보면, 효를 두드려 가면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교육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효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도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다. 십계명에서 대인(對人)관계의 첫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까지 가정에서 부모와의 관계가 잘 형성되면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다. 우리 몸의 세포와 같다. 세포가 잘못되면 암에 걸리고 몸에 병이 나듯이 가정이 잘못되면 사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성경적 효’는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공경과 형제우애를 통해 터득한 베풂과 나눔, 배려와 섬김, 인내의 덕목을 이웃으로 확장하고 창조세계로까지 넓혀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피조물과의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는 하모니 정신이자 평화사상이지요.”
원문출처 : 주간기독교 (http://www.cnews.or.kr/paper/news/view.php?papercode=news&newsno=1960§no=21§no2=0&pub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