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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일가상

사회공익부문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PATRICK JAMES MCGLINCHEY

"제주도의 영원한 아일랜드 유채꽃"

1953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제주도 한림천주교회의 주임신부로 부임, 성 이시돌 목장을 통해 제주도의 경제적 정신적 가난을 몰아내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코자 가난한 섬마을 사람들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소와 양, 돼지를 기르며,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양로원, 병원, 유치원, 사료공장 등 많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나는 내가 상을 받는 것보다 제주도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이 더 좋습니다." 
  1953년 가난과 전쟁으로 일그러진 한반도의 남단 제주도에 첫발을 내딛은 지 41년, 화산암의 불모지 제주도를 목축의 낙원으로 바꿔놓은 노란 머리의 신부, 그러나 이제는 분명 한국인이자 이시돌 목장의 대표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가 제4회 일가상 사회공익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1928년 남아일랜드의 카톨릭 집안에서 수의사인 아버지 파드리시오 맥그린치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보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난 맥그린치 신부는 콜롬반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953년 4월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어 제주도 한림 천주 교회의 주임 신부로 부임, 성 이시돌 목장을 통해 제주도의 경제적, 정신적 가난을 몰아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옛날부터 제주도는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미신이 많았던 섬.  그 곳에 한국말도 할 줄 모르는 노란 머리, 흰 피부, 회색 눈을 가진 스물 다섯살의 젊은 카톨릭 신부가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땅으로 전교를 위해 건너와 이제는 제주도에서 매우 유명한 이시돌 목장을 이루어 제주도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코자 가난한 섬마을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 황무지를 개간하고 소와 양, 돼지를 기르며,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양로원과 병원, 유치원과 사료 공장과 경로당 등 많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벌여온 그. 
  고려시대 몽고에 대항한 삼별초의 마지막 항전지로 제주도는 일백년 동안 일본 정복을 꿈꾸던 몽고인들의 지배를 받아 변소에서 인분으로 돼지 키우기 등 불결한 몽고식 풍습이 남아 있었고, 일본 식민지 시기를 통해 또 다른 수탈과 의식의 왜곡으로 매사에 [일본인들도 실패했다]며 [안됩니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그 시기, 더군다나 4.3항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삶의 터전인 중산간 지역에서 해변가로 내몰려 생계 수단과 가족을 잃고 피해 의식과 생존의 문제로 짓눌려 있던 그 상실의 시기에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에 왔고, 전쟁의 북새통이 진행되고 있는 남쪽의 끝, 제주도에서 그는 한국인의 절망과 제주도민의 비참한 삶을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보다 제주도에서 더 오래 살았고 제주도를 좋은 섬으로 만드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선, 늘 제주도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그래서,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만에 도착한 이 이국에서 자신의 젊음을 불사른 맥그린치 신부. 
  "맞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나 제주도 생각뿐입니다. 제주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입니다. 저는 제주도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라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제주도에서 핀 영원한 아일랜드의 유채 꽃 맥그린치 신부. 
  그런 그의 태도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순수하다. 그리고 그를 만나 잠시라도 만나 본 사람은 그가 얼마나 제주도를 사랑이 물씬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전해져 온다. 
  그 역시 한 인간이었으나 '일'을 통해 물질적 빈곤과 싸워 승리한 전과물을 자신이 소유하기 보다 기꺼이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들 영혼의 문제까지도 해결하고자 애쓰므로 제주도에 삶의 희망을 가르쳐 준 목자, 맥그린치 신부. 
  "나는 편히 지내기 위해 신부가 된 것이 아니며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한국에 거름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나는 목축을 통해 제주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거름이 되어 제주도를 위해 몸을 바치려 합니다. 내가 제주도의 축산업을 위해 애를 써 제주도의 살림이 나아진다면 더 큰 고생이라도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는 눈을 감을 때까지 이시돌 목장을 통해 제주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300만평의 넓은 목장에 800마리의 양, 1000마리의 소를 가진 대목장이 된 이시돌 목장을 보며 주위 사람들은 이제 그만 쉬라고 그에게 권유한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결할 뿐이다. 바로 위와 같은 대답이 전부이다. 
  그래서일까? 40년을 넘게 제주도에 살면서 제주도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다녀온다는 한라산을 그는아직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건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66세의 나이와 많은 이시돌 가족들이 목장 곳곳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손으로 자신의 식사를 챙겨 먹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이룩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공적은 다음과 같다. 
  (1) 제주 지역 최초로 신용협동조합 개설, 제주도 전역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일으켜 28개의 신용협동조합이 뿌리를 내려 고리대금을 사라지게 하는 데 기여 
  (2) 57년 - 가난과 자연 환경으로 인한 청소년 이농 이향 방지와 자립터전을 마련, 제주도 최초로 4-H클럽을 조직해 농촌개발을 위한 기초 기반 조성, 청소년들에게 가난과 자연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수 있는 가축 은행을 창설, 좋은 씨종의 가축을 지역 주민에게 무상 분양 
  (3) 59년 - 황무지 개간을 통해 목초지를 개발하고 양을 키워 양털 가공을 위한 직조(수직)물 강습소를 개설, 주부와 소녀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현재의 한림수직으로 성장 
  (4) 61년 - 스페인 출신 농민의 주보 성인, 이시돌의 이름을 딴 성 이시돌 중앙실습 목장 (후에 재단 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가 됨)을 개설, 제주도 사람들에게 목축업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목축에 관한 제반 이론과 기술 등을 전수
  (5) 63년 - 제주도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중산간 지역 개척을 통한 목축업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중산간 지역에 개척 농가를 조성하는 한편, 가축의 사료 부족과 주민의 식량을 해소하기 위해 미국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사료용 옥수수 도입 승인을 취득, 목축업을 하는 이들에게 제공 
  (6) 64년 - 가축의 증식에 따라 사료용 옥수수 도입만으로는 가축의 사료를 해소할 수 없어짐에 따라 이시돌 배합사료 공장을 건설해 영세 양축 농가에 원가로 공급 
  (7) 69년 - 뉴질랜드에서 번식용 면양과 종돈을 도입, 품종 개량을 통한 소득 증대에 기여 
  (8) 69년 - 개척 단지 조성 사업기술과 자금 지원 등으로 제주도 당국을 설득, 한라산 중턱의 중산간 지역의 황무지를 개척해 축산 단지 40세대와 양잠 단지 90세대를 조성, 땅없는 주민들을 입주 정착시킴 
  (9) 70년 - 가난과 제주 시내를 제외한 근린 지역에 병원이 없어 병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약품과 지원비 등의 지원을 얻어내 이시돌 목장내에 성 이시돌의원을 개원, 많은 생명을 살림 
 (10) 73년 - 기술과 시설, 사료 지원 등을 통해 양돈협업농가 200세대 중산간 지역에 조성 
 (11) 81년 - 이농 등으로 인한 무의탁 노인이 많아짐에 따라 농촌 노인복지사업에 착수, 이시돌 목장 내에 성이시돌 경로당 개관과 성이시돌 노인학교 개교, 그리고 북제주군 제1호의 성이시돌 양로원을 개원하여 현재 68명의 무의탁자를 입양 수용 중. 아울러 노인 학교를 농촌노인대학으로 발전 개편, 약 1백명의 노인에게 오락과 건강 관리 프로그램 등을 제공 
 (12) 84년 - 제주도 당국에서 추천한 목축 농가에게 번식용 소 350두를 시가의 반액에 분양 
 (13) 85년 - 성 이시돌 목장 등 농촌 부락에 유치원 2개와 유아원 1개소를 개원 
 (14) 86년 - 90년 농, 공 병행사업의 일환으로 성 이시돌 목장 내 치즈 공장과 우유 가공공장을 건설하고 성이시돌 한림수직사를 증축하는 한편, 성이시돌 양로원 단독 주택 20개 동 증축 
 (15) 91년 - 성 이시돌 배합사료 공장 현대화 시설 준공 
 (16) 93년 -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교육 프로그램 제공을 위한 성이시돌 사회교육연수원 설치 허가를 제주도 교육청으로부터 승인 받음

학력 및 주요 경력

▣ 학   력 
1952       콜롬반신학대학 신학과 졸업
 
▣ 경   력 
1951      사제 서품
1953       대한민국 선교사 파견  
                전남 순천 천주교회 보좌 신부
1954      제주도 한림천주교 주임신부 취임
1962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설립 
1992-현 재 본재단 이사장겸 천주교 금악교회 주임 신부 

▣ 수상업적
1957        4-H 클럽 조직 육성과 가축은행 창설
1959        직조(수직)물 강습소 개설, 주부와 소녀들에게 기술 습득 
1961-현 재  성이시돌중앙실습 목장 개설 
1963        미국정부로부터 PL-480 제2관 사료용 옥수수 도입승인 
                  취득과 동시에 개척 농가 조성, 98세대 입주 
1964-현 재  이시돌배합사료 공장 가동, 영세 양축가에 원가 공급 
1970-현 재  성이시돌 의원 개원 
1973        양돈협업농가 200세대 조성, 기술과 시설, 사료 지원 
1981-현 재  농촌노인복지사업 착수, 경로당과 노인대학, 복지회관 등을 개관 
1985-현 재  농촌부락에 유치원 2개소, 유아원 1개소 개원 
1987-현 재  성이시돌 양로원 단독주택 20개동 증축 
1993        제주도 교육청으로부터 성이시돌 사회교육연수원 설치 허가를 승인 받음 


제주도 이시돌목장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www.isido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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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  김  현

전    화 :  02-564-5990 | 팩스 : 02-564-5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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