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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겨레혼을 일깨운 김용기 장로 - 현삼원 감사(세일회계법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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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두란노 아버지학교 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아버지’ 11월 호 특집기사 인생의 멘토에 실린 것입니다.

구국을 향한 개척정신

일가 김용기 장로님은 가난한 우리나라의 농촌 부흥을 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평생을 농민 교육과 국민 계몽에 힘썼다.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5차례에 걸쳐 황무지를 개척해 농촌이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 제1, 제2의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워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기독교 농촌지도자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과 지도자 양성에 헌신한 공로로, 1962년 제1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셨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훈련받거나 교육받은 국민이 거의 백만에 이를 정도로 한국의 근대화에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장로님은 말로만 농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짓고 생활 속에서 근로, 봉사, 희생 정신을 실천하셨다. 1938년 경기도 양주에 ‘봉안 이상촌’을 만들어 황무지를 개척해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고 ‘삼각산 농장’과 ‘용인 에덴향’을 개척해 기독교 이상향을 실현하셨다. 공동생활 형태를 취하면서 기축부업을 의무화하고, 협동조합, 소비공매조합 등을 결성하여 농민의 권익을 도모하는 한편, 금주, 금연, 관혼상제 간소화 운동도 전개하셨다. ‘고구마 12개월 저장법’을 개발하여 농가소득에 기여했고 1944년 10월 농민동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공출과 징용, 징병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하셨다.

노동의 가치를 일깨운 지도자

김용기 장로님은 어릴 때부터 늘 선친으로부터 ‘조상인 안동 김씨 가문이 나라를 망하게 한 죄가 크다. 그러니 후손인 우리는 그 죄를 갚는데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듣고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으셨다. 또 자녀들에게 “절대 벼슬을 하지 말고, 남들이 싫어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제치하에서 양심을 팔지 않기 위해서 농업을 택하셨고 삼천리 강토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게 하자고 농민의 지도자가 될 것을 결심하셨다. 가나안농군학교를 개척한 배경에는 김용기 장로님의 복민사상, 즉 하나님의 복 받은 백성이라는 복민주의가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복민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땀 흘려 일하여 가나안 복지를 개척해 이루어 나가는 민족을 말한다.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구원의 축복과 창조적인 행위, 가장 신성한 가치라는 교훈을 주시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시며 검소한 생활을 엄격하게 실천하셨다. 나는 40년 전 군 장교 시절에 선생님이 쓰신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읽고, 성경적 신앙생활의 실천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정신개척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1979년 여름 원주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하여 15일간의 정규 교육을 받았다. 그 당시 5대째 신앙을 물려받아 좋은 설교는 많이 들었으나, 삶과 일치하지 않은 신앙에 상당한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김용기 장로님을 보며 ‘예수는 이렇게 믿어야 하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식사 한 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자’는 가나안농군학교의 생활 수칙을 이야기하실 때, 작고 다부진 체구에, 지혜가 넘치는 말씀과 진지하고 밝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뵈신 믿음과 행동을 항상 함께 실천할 것을 강조하셨는데,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생활수칙부터 강조하셨다. 언제나 새벽4시에 일어나 구국기도실에서 나라의 미래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신후 5시에는 산소통으로 만든 종을 두두려 잠을 깨우시고 예배를 드린 후 교육생들과 함께 구보하셨다.

먼저 바른 삶을 실천 하십시오

그 당시 60대 후반에 원주의 신림면의 임야에 가나안농군학교를 개척하셨는데, 젊은이들 못지않게 강건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직접 고안한 강소한 생활복장에 고무신이나 털신 같은 것을 신으셨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는 식사 때마다 3가지 반찬만 허용이 되었는데 이는 선생님 생신날에도 예외가 없었고, 밥이나 반찬을 남겨서도 안 되었다. 치약은 3밀리미터, 비누도 3번만 문지르고 세수를 할 때나, 하고 난 물도 아껴 써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가나안농군학교에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이면 항상 식사하기 전 기도와 함께 “먹기 위하여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해 먹자!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구호를 외쳐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62년 학교를 찾았다가, 감자와 빵을 대접받았는데, 별 생각 없이 빵을 입에 물었다. 선생님은 “각하는 백성의 어버이시지만, 이곳에서는 제가 어버이입니다. 이곳에서는 식사기도부터 드려야 합니다.” 정중하면서도 근엄하게 말씀했다. 박 대통령은 즉시 빵을 내려놓고, 기도를 경청한 다음, 구호제창까지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가나안농군학교에서는 누구나 규칙을 따랐고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1981년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화 받은 몇몇 제자들이 선생님의 가르침과 사상을 후대에 알리고 우리사회에서 실천하고자 일가회를 조직했다. 3개월에 한 번씩 15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가나안농군학교에 모여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제자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문열과 팽창, 암울한 정치 현실을 성토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지금 이 자리에 열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제부터 여기 모인 열 사람이라도 먼저 바름 삶을 실천하면 우리나라 교회와 정치가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모두 기도합시다.” 김용기 장로님께서는 그날 모인 우리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근로, 봉사, 희생을 실천하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땅 사랑을 실천하고자 내가 먼저 근로하고, 내가 먼저 봉사하고, 내가 먼저 희생하자’며 십자가 정신을 강조하신 점이 내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남에게‘하자’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하는’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대로 내 삶속에 심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가나안 농군학교를 모델 삼아 청주 근교에 약 2만평의 임야를 개척해 농장을 만들고 앞으로 복지시설을 지어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과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 장로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이웃, 땅 사랑을 실천하려 기도하고 있다. 또한 장로님께서 항상 민족의 통일을 휘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통일에 대한 기도와 준비도 잊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북한이탈주민 가역을 위한 ‘하나로 교회’설림에 동참하여 탈북청년들을 섬기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와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동남아 저개발국 10여개 국가에서 한국적인 부흥을 배우고자 가나안농군학교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며, 국가 지도자들을 보내어 가나안교육을 받고 김용기 장로님의 개척 정신을 열심히 배워 국가발전을 도모하고자 애쓰고 있다. 새벽마다 산소통으로 만든 개척의 종을 치시며“조국이여 안심하라!”라고 외치셨던 장로님은 단순히 새벽잠을 깨운 것만이 아니라 잠자는 민족의 혼과 방황하는 인류 모두의 혼을 깨우셨던 위대한 스승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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