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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일가상

농업부문

진재량
진재량
낙농인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자"

진재량 선생은 1951년 병아리 50마리로 축산업체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광일농장이라는 대목장을 경영하는 대표적 낙농인이다. 그는 초지가 부족한 광주지역의 버려진 산간지역 개간에 성공함으로써 열악한 축산업에 큰 희망과 모범이 되었다. 산림조성에도 최선을 다해 35년여를 나무 심기에 정성을 기울여 온 인물이기도 하다. 


  진재량 선생은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광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3년간 초,중,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28세 때인 1951년에 병아리 50마리로 축산업에 발을 드려놓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광일농장이라는 대목장으로 전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전남지역의 대표적인 낙농인이다. 
  일제 시대 6km의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던 진재량 선생은 6년동안 지각과 조퇴 한 번 없이 개근 졸업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억척스러움을 몸에 익혀온 이였기에 병아리 50마리를 가지고 부업으로 시작한 양계를 오늘날 젖소 300여 두와 돼지 200여 두의 대규모 낙농가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모두가 어렵기만 하던 1950년대에 그가 남들이 부러워 할 교사직을 박차고 나와 양계에 전념하게 된 동기가 있다. 바로 그 시대 사회적 혼란기를 반영하듯 교내 학생들끼리는 물론, 심지어는 교사에게까지 자행되던 폭력과 살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학교를 물러나와 버렸다. 
  "2천명의 너희를 제자로 해서 교육이라 노력해 왔는데 너희는 학교를 통해 인간 윤리를 배우기 보다 폭력과 살인을 배우고 있는 듯 하여 내 능력이 없어 이제 차라리 2천 마리의 닭을 키우며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아 물러나니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 
  그가 학교를 그만둘 당시 50마리의 병아리는 이미 2천 수의 닭으로 변해있었다. 교사에서 양계장 주인으로 변한 그는 열심히 닭을 키워 닭이 3천 수에 달하자 부화장을 겸업하여 3만 수의 기업양계로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점에서 또 다시 양계를 포기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전국적으로 다두사육 방식이 번성하면서 자연의 축산물인 계란이 공산품처럼 마구 생산되기 시작하지 않았겠습니까. 양계장이 아니라 이건 계란 공장이나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 후, 그는 자신이 교사 시절부터 생각했던, 우리 농촌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논,밭 농사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기 시작했고 70년 캐나다 젖소 8두 도입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축산업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 때부터 진재량씨 가족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광주시 주변은 초지가 부족했기에 그는 버려진 산간 지역의 황폐한 땅을 구입, 개간하여 초지를 조성하였다. 산지개발을 통한 축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가 지금까지 무등산 등성이에서 일군 초지가 약 80만 평. 광일 농장의 도로 연장만 해도 40km. 말그대로 대목장이 된 것이다. 물론, 그렇게 이루기까지의 고통과 좌절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누구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산지 개발을 통한 축산업의 성공은 전 국토의 약 70%를 차지하는 열악한 상황의 축산업에 큰 희망과 모범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농업을 자신의 사명으로 이어가고자 결심하는 국내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물론, 외국인들에게도 훌륭한 실습장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뜻은 그가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농대 졸업후 아버지의 뜻을 이어나가고 있고 세째 아들도 공대 졸업 후 형들의 뜻에 동참, 젊은 이들이 모두 떠난다는 오늘날 농촌의 실정과는 달리, 광일농장은 4부자가 대를 이어 한국 낙농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보기 드문 낙농 가족이다. 
  한편, 진재량 선생은 개발에만 몰두하지 않고 산지 개발 당시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산림 조성에도 최선을 다해 35년여를 나무 심기에 정성을 기울여 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자연을 자연 그대로 최대한 보호하고 가꾸면서 축산업과 화합시켜 나가보자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 다른 이들이 듣기엔 좀 바보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는 - 그러나 분명 옳은 그의 신념이 이제는 서서히 빛을 보며 구체화 되고 있다.    무등산 도립공원에 인접한 안양산을 개발, 모두가 자연의 품에 와서 안겨 쉴 수 있는 {자연 휴양림}을 조성 계획하는 그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그가 지금껏 쌓아온 정성과 노력을 다시 {안양산 자연 휴양림 개발}에 쏟아붓고 있다. 휴양림 개발을 통해 날로 삭막해져 가는 현대인의 심성을 새롭게 재충전하고 특히, 노인과 청소년들에게 자연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그는 어느새 칠순을 넘어선 지금에도 새벽 6시부터 다시 삽을 들고 개척의 의지를 안고 무등산 자락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 안양산에 우리 모두가 안식할 수 있는 그 본래의 자연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가 자연을 통해 받은 축복과 은혜를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공유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에도 무등산 자락에서 우리 모두가 자연속에서 마음꼇 숨쉴 수 있는 길을 열심히 개척해 나가고 있다.

학력 및 주요 경력

▣ 학   력 
1943 광주사범학교 졸업
1958 조선대 문리대 졸업 

▣ 경   력 
1943-1956불갑국민학교,삼계 중학교,조선대 부속 중,고등학교교사
1958-현재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전남도지부장, 한국축산연구회장, 양계협회. 양돈협회 전남도지부장, 한국낙농협회 부회장, 전남 도청 조절위원, 전남 초지 조성 심의위원 

▣ 수상업적 
1956 전남 지정 종계장으로 선정
1962 전남 지정 종축장으로 선정 
1968현재 전남 광산군 비아면에 제2농장 개척
1969 세계적으로 우수한 경제산란계틕샤원종 도입,부화 보급 
1960 현재 100여 정보의 땅에 조림
1970 현재 캐나다산 젖소 8두 도입, 낙농 시작 
1974 현재 담양군 해발 500m 산지에 초지 200정보 조성 
1983 현재 350정보의 목초지와 야초지에 300여두의 착유우, 육성우 사육
1992 산림청으로부터 모범 독림가 인정 받음 
1992 현재 안양산 자연 휴양림 조성 착수
1966 현재 목장을 새마을 청소년 훈련과 농대. 농전. 농고학생 실습장으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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